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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보복카드만 100개…수차례 경고, 文정부 무반응"

지난해 11월 외교부와 산업통상자원부 고위관계자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건 사람은 두 부처를 두루 거친 전직 고위관료였다.

그는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 이후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두 부처에선 “알았다”고만 답했다.

이 전직 고위관료는 2일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여러 채널을 통해 일본 정부의 보복 징후를 포착했고 이를 알려줬다”고 말했다. 그는 “민간·정부 부문의 지한(知韓)파 인사가 귀띔해줬고 이를 전달했다”며 “정부가 컨틴전시 플랜(contingency plan·비상계획)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고 말했다.

그는 “문제는 일본 정부가 준비한 여러 보복카드 중에 이제 겨우 한 개가 나온 것”이라고 경고했다. 반도체 핵심소재에 대한 수출 제한 조치에 이어 단계적 보복카드가 준비돼 있다는 의미다.

통상 전문가는 예상 가능한 카드로 ▶농·수산물 수입제한(농림수산성) ▶전략물자 수출제한(방위성) ▶단기 취업비자 제한(법무성) ▶송금 제한(재무성) 등을 지목한다. 한국 정부의 대응에 따라 더 강력한 경제보복에 나설 수 있다는 의미다.

지한파 경제학자인 후카가와 유키코(深川由起子) 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 교수는 이날 전화 인터뷰에서 “일본은 복수의 정부부처가 공동으로 전략을 짜왔다”며 “보복 조치를 취했을 때 한국 경제에 미치는 효과가 큰 카드를 장기간 검토했다고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이 단계적 경제 보복 조치에 나설 경우 한국 경제는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사진은 삼성전기 부산공장의 클린룸. [사진 삼성전기]

후카가와 교수는 이어 “중국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에 대해 국제법 위반 소지가 있는 경제적 보복을 했지만, 일본은 법적 문제가 없는 ‘그레이 존(grey zone·회색지대)’을 검토한 후 카드를 꺼내 들었다”고 분석했다.

일본이 공식·비공식 채널을 통해 여러 차례 경제보복 가능성을 내비쳤음에도 대비가 부족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는 “일본 언론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한국에 대해 190여개 이상의 조치를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며 “사전에 차분하게 대응했어야 했는데 이런 사태까지 이르게 된 게 안타깝다”고 말했다.

지난 3월 일본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는 의회에 출석해 “일본 기업에 대한 피해가 현실화하면 한국에 대해 송금 중단, 비자 발급 중지 등 여러 보복 조치가 있으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가 사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또 다른 전직 관료는 “올 초 해외 포럼에서 일본 경제산업성 한국 담당 관료가 ‘보복 조치 가능성이 있다’고 귀띔해 줬고, 일본 기업 초청 투자설명회(IR)에서 민간 부문 관계자가 ‘이런 (한·일 관계) 상황에서 일본 기업의 투자를 요청하다니 정신 나간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후카가와 교수는 “한국 대법원 판결을 전후로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여러 방식으로 경고했지만 한국 정부는 피드백(반응)이 없었다”며 “일본 정부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렸거나 사태가 심각해지면 대응하겠다는 한국 정부의 태도가 지금의 사태를 야기한 것 같다”고 말했다.